어떤 구단의 선수 명단에는 아무도 쓸 수 없는 등번호가 있습니다. 영구결번입니다. 그 번호를 달았던 선수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구단이 번호를 영원히 비워두는 것으로, 프로 선수가 받을 수 있는 사실상 최고의 예우입니다.
영구결번에 정해진 공식 요건은 없습니다. 구단이 결정하는 명예이기 때문입니다. 하지만 실제 사례들을 보면 공통분모가 뚜렷합니다.
이 세 가지가 겹치는 선수는 한 세대에 몇 명 나오지 않습니다. 그래서 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영구결번의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, 적기 때문에 무겁습니다.
등번호는 원래 그냥 숫자입니다. 신인 시절에는 남는 번호를 받기도 하고, 선배가 떠난 번호를 물려받기도 합니다. 그 숫자가 상징이 되는 것은 시간입니다. 같은 번호로 10년 넘게 한 유니폼을 입고, 그 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이 관중석을 채우고, 어린 선수들이 그 번호를 달고 싶어 하게 되는 과정. 영구결번식에서 은퇴 선수가 자신의 번호가 그라운드에 걸리는 것을 보는 장면은, 프로야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완성된 서사 중 하나입니다.
영구결번은 명예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. 구단 입장에서는 쓸 수 있는 번호가 하나 줄어드는 실질적 비용이고, 그래서 더더욱 아무에게나 주지 않습니다. 또 영구결번을 사양하는 선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. 후배가 그 번호를 달고 더 큰 역사를 쓰기를 바라는 마음, 혹은 자신의 야구가 박제되는 것에 대한 부담. 번호를 비워두는 것과 물려주는 것 중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에 대한 답은 선수마다 다릅니다. 확실한 것은 그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 자체가 커리어 전체에 대한 최종 평가라는 사실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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